15연에서 시인은 '두 마음 품은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범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종종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을 보게 된다. 성경에서도 늘 등장하는 것이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인 것을 보면 어쩌면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겠다. (1월 6일 주일 말씀 기억하시죠? "결단과 각오" 수24장)
주 안에서 형제 자매를 사랑하고 그들의 연약함을 세워가야함이 마땅하지만, 사실 밉다. 그들의 믿음없는 지껄임이 짜증이난다. 성경 말씀에도 보면 그들이 두 마음을 품은 건 신앙의 불확실성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악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약 4:8)
이러한 혐오감은 의와 불의를 동시에 사랑할 수 없는 당연한 이유일 수도 있겠다. (아직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을 미워하는 것이 나만의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에 작은 위로를 받는다.)
이러한 두마음을 품은 자들을 향한 미움이 강해질 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사모하게 된다.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을 볼 때, 자신의 연약함을 되돌아 보게 된다, 나 역시 두 마음을 품었을 때가 있었음을.... 그리고 여전히 본성적으로 언제든지 두 마음을 품을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기도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붙들어 주시고 지켜주시겠다는 언약적 약속을 이행하시지 않으시면 그 누구도 안전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누이 그 약속을 확인해주셨고 우리도 시인처럼 이 기도를 드리며 그 약속의 이행을 주장할 수 있다.
내가 하나님의 율례와 길을 외면하고 떠나는 순간은 내가 하나님을 멸시하는 때다. 하지만 두렵게도, 이 때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는 내 선택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신다. ( 크리스토퍼 애쉬, "시편 119편", 174p)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n.d.). (electronic ed., 롬 1:24). South Korea.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n.d.). (electronic ed., 롬 1:26). South Korea.
◎또한 그들이2)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헬, 지식에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n.d.). (electronic ed., 롬 1:28). South Korea.
하나님께서 버리신 자들의 말로를 생각하니, 시인은 엄청난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거대하고 까마득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거나, 끝도 없는 검은 도굴을 보듯이, 지옥의 깊은 심연을 보고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며 움츠리는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두려움은 건강한 두려움이다. 이러한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면, 인간은 본성상 세상과의 안락한 동거에 마음이 끌리기 마련이다.
이런 건강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과의 안락한 동거에 마음이 끌리는가? 우리도 그들과 다를 바 없다거나 세상과 어울려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빠지지 않는가? 너무나 이질적인 가치를 사람들에게 고집하면 복음전도에 도움이 안 된다고 합리화시키지는 않는가? 모나지 않게 대충 어울리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 받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우리는 찬양자가 느끼는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 하나님이 그의 길을 저버리는 자들을 버리실 것이라는 자극을 마음에 확고히 새겨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떨어야 한다. 그는 우리의 은신처와 방패가 되시는 분이시지만, 어긋난 길로 가는 우리를 심하실 두려운 분이다. 그러므로 매일 하나님의 길로 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한다. ( 크리스토퍼 애쉬, "시편 119편", 177p)
-16연 '충성'
16연에서 시인은 계속해서 자신을 '주의 종'으로 표현한다. 119편에 계속적으로 등장하는 이 단어는 "주님께서 내게 성실히 행하시는 분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주님께 충성합니다. 주의 영광을 목숨처럼 여기며 내 운명을 주님께 의탁합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쓰인 단어이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일하셔야 할 때입니다!'(126)라고 기도한다. 우리도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근데 우리의 기도의 목적은 무엇인가? 내 삶의 유익, 혹은 내 삶의 고통, 내 삶의 만족, 승진, 사람들과의 관계의 낙심... 이러한 것이 아닌가?
시인이 기도하는 이유는 자신의 필요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의 영광에 초점이 있다. "그들이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우리의 위로가 아니라 주님의 영광이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소홀히 할 때 슬퍼하고 기도해야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을 건드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려는 갈망이 생기도록 이끈다. 교회에서 성도들과 교제를 나눌 때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며 구하는가? 개인적으로도 하나님을 구하며 바라는가? ( 크리스토퍼 애쉬, "시편 119편", 186p)
-실천사항 : 각 교육기관에 두 마음을 품고 있는 다음세대들이 있다. 그들을 위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