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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수고

20190619 히브리서 11:1-12

형목사 2019. 6. 19.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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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묵상의숲 #매일성경

 

20190619 히브리서 11:1-12

 

믿음

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The Holy Bible: Korean Revised Version. (n.d.). (electronic ed., 히 11:1–12). South Korea.

 

    1-2 믿음의 정의

    원문에 보다 충실한 해석에 따라 1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면 본문의 이해가 조금 더 쉬울 것 같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을 확신함,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확증함입니다. 옛 사람들이 이것으로 인정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라는 것들을 아래에서 떠받치고 있는 지지대처럼 단단한 마음의 상태가 ‘믿음’이다.

    그러나 사실 엄밀히 말해서 이것을 믿음의 온전한 정의라고 보기 어렵다. 믿음의 모든 측면을 짚어내는 것도 아니고 가장 중요한 핵심을 꿰뚫은 것도 아니다. 믿음은 셀 수 없이 많은 양상으로 나타나고 히브리서 설교자는 그중 특수한 두 가지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이 두가지일까? 이에 대한 답은 이어지는 11:3-38에 나온다. 이 두가지 원리가 믿음으로 인정받은 ‘선진들’에게 공통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3 창조를 믿음

    히브리서 저자는 놀랍게도 이 믿음의 기초를 이야기 하면서 제일 먼저 ‘창조’를 이야기 한다. 세상의 창조가 전적으로 계시이고, 동시에 전적으로 역사라는 사실을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인정하고 납득할 수 있다.

 

    4 아벨의 사례

    하나님이 왜 ‘가인과 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고 그의 제사’는 받으셨는가? 창세기는 명확한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히브리서 설교자는 그가 ‘믿음’(바라는 것들을 확신함, 보이지 않는 것들을 확증함)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추론한다. 아벨에게 붙여진 ‘의로운 자’라는 호칭은 제사의 과정과 태도 전체에 있어 신실했음을 시사한다. 그는 한 번의 제사만이 아니라 전 생에 동안, 죽음의 순간까지 믿고 또 믿었다. 아벨은 ‘죽었지만 그것을 통해 아직도 말하고 있다.'

 

    5-6 에녹의 사례

    믿음으로 ‘죽었던’ 아벨과는 대조적으로 에녹은 믿음으로 ‘죽음을 맛보지 않았다.’ 단지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하늘로 옮겨졌따.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게 했고 믿음으로만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믿음은 두 가지 내용을 지닌다. 하나님의 존재와 선하심이다(6절).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상’은 아버지의 선하심에 대한 제유적 수사로 이해할 수 있다.

 

    7 노아의 사례

    노아에게 ‘아직 보이지 않는 일들’은 심판의 홍수였다. 노아가 홍수 심판을 마치 본 것 처럼 여길 수 있었던 이유는 홍수 자체의 무시무시함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홍수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따. 하나님의 존재의 선하심을 믿었다는 점에서 노아와 에녹의 믿음은 결국 같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다. 기독교 신앙은 보이지 않는 초월적 세계를 상정한다. 그 세계에 중심에 하나님이 계씬다. 우리는 어떤 가치를 믿는게 아니라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이 어떤 가치의 총화를 넘어 인격적 존재이심을 믿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땅과 현실로부터 도피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세계 심판과 구원이라는 시대적 사건을 이끄는 동안 노아의 하루하루는 어땠을까? 지겹고 힘겨운 노동 없이 방주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믿음의 결과가 큰일, 멋진 일이라고 해서 과정도 그런 것은 아니다. 신앙인의 자리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자신과 성실히 싸우는 일상이다.

 

    8-12 아브라함의 사례

    노아처럼 아브라함도 ‘아직 보이지 않는 일들’을 삶의 지표로 삼았다. 그리고 떠났다. ‘상속받을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 채 떠났다. 아브라함이 알아야 했던 것은 땅의 위치가 아니라 그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선하심이었다.

    집을 떠난 사람이 장막을 치치는 건 일견 상식적인 행동이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히브리서 설교자가 부각하는 점은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도착해서도 계속 장막에서 살았다는 점이다. 아들 이삭, 손자 야곱까지 함께 그렇게 했다면 여기엔 뭔가 특별한 뜻이 있다. 본래 유목민도 아닌 사람이 자손들까지 거느린 마당에 빨리 정착해서 자기 집을 짓고 안정을 추가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설교자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마치 외국에서 살듯이 그 땅에 얹혀살았다.’ 어쩔수 없는 환경 때문이 아니었다. 그에게 유랑 생활은 믿음으로 살기 위한 결단이었고 실천이었다. ‘하나님께서 그 건축자와 창조자가 되신 성읍(10)’에서 살기를 기대하기 때문이었다. 아직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기대 때문에 현재의 상실과 실패를 차저하는 용기가 신앙이다.

 

    약속의 성취를 오늘 가져와 사는 믿음

    믿음은 바라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배후에 실체가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것이며, 믿음의 사람들은 그것들을 이미 성취되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 처럼 살았다. 약속 받은 것의 그림자와 모형만 있던 시대에도 그들은 이미 그 약속에 참여한 사람들처럼 거짓 약속과 눈에 보이는 번영에 유혹되지 않았으며, 약속이 성취될 것 같지 않은 암담한 현실에도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했다.

 

    ‘믿음’은 무엇이며?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을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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