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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수고

20190314 느헤미야 11:1-36

형목사 2019. 3. 1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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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은 만들어졌지만 거기에 정착하고 살아야 할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래야 도시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만불짜리 집이 있어도 거기 사람이 살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마찬가지로 힘들게 성벽을 재건해도 거기에 사람이 살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사람들을 이주시켜서 살게 하였다.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힘든 곳,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다시 세워야 하는 형편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것을 모두가 부담스러워했던 것 같다. 그러지 않아도 먹고 살기가 쉽지 않은 판인데 고생을 사서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다들 망설였던 것 같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이주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운 것이다. 예루살렘이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가 예루살렘에 남아서 희생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했다. 모판이 되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모든 공동체가 그러하지 않나 싶다. 공동체가 아름답게 성장하는 데에는 누군가의 희생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 교회만 봐도 그렇다. 보이는 곳이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 교회가 이만큼 서올 수 있었다. 그러니까 교회는 성도들의 수고와 희생을 모판으로 해서 자라가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저절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다. 수많은 성도들의 희생과 헌신, 그리고 눈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성도들의 자원하는 희생이 있는 한, 교회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앞으로도 이러한 성도들의 희생의 비옥한 토양 위에서 교회가 더욱 아름답게 세워져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예루살렘 성을 위해 제일 먼저 희생한 이들은 지도자들이었다. 예루살렘 성을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인하여 지도자들이 솔선하여 예루살렘에 머물렀다. 힘들고 어려운 일일수록 지도자가 앞장서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지도자는 본을 보여야 한다. 지도자의 자리는 누리는 자리가 아니다. 앞장서는 자리이다. 대가를 지불하는 자리이다. 국제투명성기구에서 2018년도에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2017년도 국가별 부패인식지수에서 한국이 180개국 중에서 51위였다. OECD 35개국 중에서는 29위였다. 이걸 보면, 한국의 부정과 부패가 간과할 수 없는 상태임을 알 수 있다. 그 결정적 이유가 바로 정치 지도자들의 부패에 있다. 한국 지도자들은 권력과 부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 부정부패가 심하다는 것이다. 과연, 조국의 뉴스를 보면 지도급 인사들의 권력형 비리가 늘 톱뉴스를 장식할 정도이다. 안타깝지 않을 수가 없다. 성경적 지도자상은 ‘나를 따라 오라(Follow me)’이다. 바울도 그렇게 말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세상의 지도자는 군림하는 자이지만 교회의 지도자는 섬기는 자이다. 하나님은 교회의 지도급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 더 큰 책임을 요구하심이 분명하다. 다들 주저하고 망설일 때 발 벗고 나서서 자신의 역량껏 희생하는 사람이 지도자이어야 한다. 예루살렘은 이러한 지도자들의 아름다운 희생으로 인해 든든히 세워질 수 있었다. 이런 아름다운 희생이 나와 우리 리더들에게서부터 시작되어 우리 교회 전반에 흘러넘치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턱없이 부족했기에 제비뽑기라는 비상수단까지 동원했다. 그래서 반강제적으로 사람들을 예루살렘에 정착시켰다. 이들 가운데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이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그 결정에 승복했다. 이런 것이다. 마음이 내키지 않지만 억지로라도 순복하게 되면 그건 축복이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그런 자였다. 그냥 구경 나왔다가 로마 군병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끌려 나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던 자이다. 이런 걸 가리켜 세상 사람들은 “재수에 옴 붙었다”라고 한다. 그런데 후일 보면, 이 일이 인연이 되어 그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의 아들은 루포라고 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사도 바울로부터 사랑을 받고 문안 받는 로마 교호의 신실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또한 구레네 시몬의 아내는 로마 교회에서 열심으로 헌신하고 봉사함으로 인하여 사도 바울에게 친어머니와 같이 존경받는 자가 되었다. 정말 그런 것 같다. 때론 하나님 나라를 위해, 교회를 위해 본의 아니게 사명을 감당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코 꿰듯 그렇게 희생을 해야만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아멘’으로 순종하면 구레네 사람 시몬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덩굴째 받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하는 희생이라도 하나님은 귀히 보신다는 말이다. 이러한 순종의 헌신이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 나아가 예루살렘에 자원하여 거주하기로 결단한 이들도 있었다. 하나님이 얼마나 기쁘셨을까? 이런 사람이 많은 교회는 참으로 복 있다. 이렇게 자원하는 이들이야 말로 성숙한 자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교회의 보배이고 보석이다. 이런 사람들은 주변의 성도들에게 감동을 주고 도전을 주고 은혜를 끼친다. 그래서 나는 교회의 일을 함에 있어서 자원함의 원칙에 따라 직분자를 세우려고 노력한다. 두 번, 세 번씩 권면하면서까지 억지로 일을 잘 맡기지 않는 편이다. 어제 밤에도, 전성권 집사님이 순모 형제와 함께 청소년 아이들을 픽업하여 같이 운동하며 아이들과 소통하는 헌신의 모습을 보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고 강제한 것도 아니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참으로 감사한 건, 스스로 자원하여 섬기는 이러한 보배들이 우리 교회에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하여 눈물 나도록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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