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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2 창세기 9:18-29 본문
#말씀묵상 #매일성경 #묵상의숲
20200112 창세기 9:18-29
노아와 그 아들들
1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19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20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 나무를 심었더니
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22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23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 1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26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28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지내었고
29 향년이 구백오십 세에 죽었더라
1 둘째
The Holy Bible: Korean Revised Version. (n.d.). (electronic ed., 창 9:18–29). South Korea.
18-21 포도주에 취한 노아
노아는 최초의 포도 재배자이면서 포도주 제조 기술자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막사에서 포도주를 마시고 취한 채 벌거벗고 잠들었다. 언뜻 이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어떤 사람은 노아가 포도주를 마셨지만 취하지 않은 채 잠들었을 뿐이라고 해석하지만, 본문은 명백하게 ‘노아가 술에서 깼다’고 진술한다(9:24). 범죄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명백히 노아의 술주정이며 하체를 드러낸 행위는 구약 전반에서 비난 받는다. 풍성한 포도주는 축복이 분명했지만 과음으로 인한 술 취함은 중대한 범죄였다. 노아의 만취는 그저 노아 역시 어쩔 수 없는 죄인임을 드러낸다. 노아는 새로운 인류지만 여전히 아담의 후손이다. 따라서 노아의 당혹스러운 방종과 만취를 이상하게 볼 것은 아니다.
22-23 함의 범죄와 셈과 야벳의 선행
본문은 노아가 왜 술에 취해 하체를 노출하며 수면을 취하게 되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노아의 방종보다는 함의 행동에 있다. 술 취함과 하체 노출은 노아의 실수지만, 함의 행동은 실수로 볼 수 없는 큰 범죄다. 부모 공경은 자녀의 의무이며 십계명의 4계명에도 명시될 만큼 중요하다. 본문은 아주 단순하게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우연히 목격한 뒤 그 막사에 형제들을 구경꾼으로 데리고 오려 했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 자체만으로도 함의 행동은 중대한 범죄다. 이것은 셈과 야벳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으려는 신중한 행동에서 잘 드러난다. 그 둘은 덮고 잘 수 있는 겉옷을 준비해서 어깨에 멘 뒤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매우 조심스럽게 뒷걸음쳐서 아버지의 막사에 들어간다.
24-29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내려진 저주
노아는 술에 깬 뒤 어떤 이유로 작은 아들이 저지를 행동을 알게 되었다. 노아는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한다. 여기서 왜 함의 잘못으로 가나안이 저주 받는지 물을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주장이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결국 함에게 저주를 해도 후손에게 내려가기에 함을 저주하는 것이나, 가나안을 저주하는 것 둘다 같은 의미며, 오히려 함에게는 자신에게 내려지는 저주보다, 아들 가나안에게 내려지는 저주가 더욱 아프게 느껴졌을 것이다.
가나안에게 내려진 저주의 내용은 그가 형제들의 가장 낮은 종이 된다는 것이다.
복된 삶의 길은 무엇인가?
작고 보잘것없지만 우리 생은 하나님 앞에 복되다. 하나님 앞에 믿음과 부르심을 따라 자기 생을 사느냐가 중요하다. 나의 주변 세계를 현상이 아닌 믿음으로 보느냐가 중요하다. 우리는 세상의을 그리스도의 복으로 복 주는 자이며 왕 같은 제사장이다.
<성경 다시 보기>
“중요한 결정의 배경에는 더욱 중요한 전제가 숨겨져 있다” 크리스천 오버먼, ‘어섬션-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전제들’
성경을 읽을 때, 이미 기대하고 예상하는 메시지가 있다. 성경의 실제 내용보다는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지에만 감동을 맏는다. 그리스도인과 무신론자가 성경을 읽으면 전혀 다른 지점에서 감동을 받는다. 왜그럴까? 노아 이야기를 ‘의인 노아’라는 ‘전제’를 내려놓고 읽어보자
노아는 왜 만취할 때까지 술을 마셨을까? 홍수 심판 이후, 매일 매일 술을 먹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속 사정은 없었을까? 구원의 기쁨도 잠시, 더 이상 볼 수 없는 친구와 이웃들을 생각하면서 괴로워했을 노아를 상상해본다…
인사불성이 된 노아를, 함은 다른 형제들에게 알렸고,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허물을 가만히 덮어주었다. 술에서 깨어난 노아는 함을 저주한다. 과연 함이 저주를 받을 정도로 큰 죄를 지었단 말인가? 노아의 저주에 하나님도 동의하셨을까? 서구열강들의 식민지 지배와 수탈을 옹호하는 이야기로 읽어도 되는가? 질문이 쏟아진다.
함을 대변해주는 성경 읽기는 없는가? 노아와 그 가정을 있는 그대로 볼때, 누군가는 자신이 거할 곳을 찾았다고 오히려 안도하지는 않을까?
프레드릭 비크너가 말했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로 빛나는 환한 시기뿐만 아니라, 그분의 부재로 어두워지는 시기에 대해서도 정직해야 한다. 낯선 사람을 맑은 눈으로 직접 만나려면, 열린 마음이 필요한 것 처럼, 성경도 마찬가지다. 의인, 영웅, 유익한 이야기, 고상한 생각, 도덕적 교훈보다는 먼저, 맑은 눈과 열린 마음으로 읽아보자. 듣고 싶은 말씀이 아닌, 들려주시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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