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02 마태복음 22:34-46 본문

영혼의 수고

20190402 마태복음 22:34-46

형목사 2019. 4. 2. 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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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계명 (막 12:28–34; 눅 10:25–28)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ㄴ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ㄷ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 (막 12:35–37; 눅 20:41–44)

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ㄹ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46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ㄴ 신 6:5

ㄷ 레 19:18

ㄹ 시 110:1

 The Holy Bible: Korean Revised Version. (n.d.). (electronic ed., 마 22:34–46). South Korea.

 

 

-가장 큰 계명 논쟁 (22:34-40)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다. 모든 시험이 실패하자 그들은 마지막으로 율법의 문제의 전문가를 내세워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시도한다. 그 당시 랍비들에게 구약의 613개의계명들중 어느 것이 가장 큰가라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관심사였고, 난제였다. 각 랍비들의 생각이 달랐고 각자의 관잠에 맞추어 계명중에서 무겁고 가벼운 계명을 구분하였었다. 율법사들은 자신들의 이 주요한 관심사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그릇된 답변을 할 경우, 이것이야 말로 예수님을 제거할 수 있는 빌미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율법학자들의 의도의 질문을 또다시 율법의 핵심에 대한 적극적인 교훈의 기회를 삼으신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아래와 같다.

  1. 구약의 계명들 중에 좀 더 크고 좀 더 작은 계명이 존재한다.

  2. 큰 두가지의 계명이 있다.

  3. 하나님 사랑

  4. 이웃 사랑

    특별히, 유대인들이 하루 두번씩 암송하는 쉐마의 첫머리 말씀인 신명기 6:5 을 인용하신다. 이 계명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삶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온 것이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이처럼 익숙한 계명이 과연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핵심적인 계명임을 확인해 주신다. 특별히 여기서 ‘마음’, ‘목숨’, ‘뜻’은 인간의 전체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서, 이들의 각각의 구별된 역할을 구분하기보다는 전인적으로 주님을 섬겨야 함을 이야기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해를 돕기 위해 풀어서 설명하면, ‘너의 온 마음으로’는 마음 깊은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너의 온 목숨으로’는 순교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너의 온 뜻으로;는 생각과 계획을 세우느 ㄴ과정을 포함하며, 지적 능력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내적인 감정으로 느끼는 것을 넘어서 존재와 소유 전체로 전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두번째로 레위기 19:18절 말씀을 인용하여 이웃을 사랑할 것을 말씀하시는데, 두번째 계명은 순서상 두 번째에 배치되었으나 중요성에서 두번째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해서 , 두개의 가장 큰 계명이 있는 것이다. (운동회에 만국기가 하나의 줄에 걸려 있듯이 구약의 모든 가르침은 사랑의 두 계명이라는 줄에 걸려 있는 것으로 이해하면 이해가 쉽다). 예수님의 성경 해석의 원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이것은 동등하게 중요하며 둘다에 순종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사랑은 이웃사랑이다. 둘은 구분할 수 있지만 분리할 수 없다. 둘 다 자기 전부를 걸어야 한다. 자기 부정을 요구하는 사랑이다. 죽음을 통해 생명이 나오는 원리이다. 한계가 없는 사랑, ‘다하는’사랑, 온전한 사랑이다. 전인적인 사랑이고 모든 영역에서 증명되어야 하는 사랑이다. 그런 사랑을 먼저 받아서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매 순간, 모든 영역에서 사랑해야 한다.

 

-다윗의 자손과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한 질문 (21:41-46)

    종교지도자들의 모든 시험이 실패로 돌아갔고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질문하신다. “그리스도는 누구의 아들이냐?” 바리새인들은 자연스럽게 ‘다윗의 아들’이라고 대답한다. ‘다윗의 아들’은 왕적인 메시아에 대한 칭호였다. 유대인들은 다윗 왕과 같은 왕의 역할을 할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보내실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리고 이 대답은 실재로도 옳은 대답이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에게 다윗의 아들은 인간이지 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윗왕의 시절 처럼 이스라엘은 강대국으로 만들어줄 왕이었지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겸손의 왕이 아니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생각과 기준 속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다윗의 자손’만이 아니시다. 그분은 동시에 ‘ 다윗의 주’도 되신다. 그분은 다윗의 지상 왕자보다 시편 110:1을 인용하셔서 이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윗도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였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그의 자손이 될 수 있느냐?”의 질문에 그들은 더 이상 예수님을 시험하지 못하였다.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만 부른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본질을 심각하게 제한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원하는 그리스도를 그들의 방식대로 조각한 우상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재단하고 조각해서 만들고 만족해하는 분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시험의 대상이 아니라 순종과 사랑의 대상이다.

 

    우리가 때떄로 하나님을, 그리스도를 유대인들 처럼 내 생각과 경험에 고착화되어서, 복을 주시는 하나님, 건강을 지켜주시는 하나님, 나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으로만 믿는다면 이것은 우리의 신앙의 심각한 오류에 빠질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우리는 늘 그리스도를 말씀을 통해서 다양하게 경험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때떄로 내가 죄의 길에 들어 섰을 떄 우리를 돌이키시고자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은 부정할 수 있고, 우리가 우리의 소홀함으로 잃은 건강을 못지켜주는 무능한 하나님을 부정할 수도 있다. 

    바른 신앙은 하나님의 모습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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