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04 마태복음 23:13-28 본문

영혼의 수고

20190404 마태복음 23:13-28

형목사 2019. 4. 4.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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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4  1)(없음) 

1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16  ○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17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19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1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2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2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1) 어떤 사본에, 14절에 막 12:40과 눅 20:47과유사한 구절이 있음

 The Holy Bible: Korean Revised Version. (n.d.). (electronic ed., 마 23:13–28). South Korea.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책망23:13-36)은 23장의 중심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말씀을 하시면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화가 있다. 위선자들아’라는 말로 시작하는 7가지의 화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된다.

    마태는 ‘위선자들’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였는데, 대개 바리새인들과 연관해서 사용하였다. 여기서 ‘위선자’의 의미는 아마도 그들의 율법 해석자로서의 역할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전달하는 공인된 율법 해석자들이었지만, 실제로는 (비록 의도적으로는 아닐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율법 해석을 제공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자신들뿐 아니라 그들에게 배우는 자들까지도 멸망에 이르게 하는 실수를 범하는 자들이 되었다.

    앞으로 나오는 7개의 화는 1-2, 3-4, 5-6, 의 쌍을 이루고 7에서는 결론을 이루는 형식으로 볼 수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화(23:13-15)

    첫째 화와 둘째 화는 위선적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열정이 어떤 결과를 낳는 지를 보여준다. 이들의 첫번째 문제점은 ‘위선’이었다. 이들은 겉으로 보여지기에는, 그리고 자신들의 생각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이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의 행동이었다. 이것이 ‘위선’이다. 그릇된 해석과 자신들의 해석이 옳다는 교만함의 결과 그들은 위선자가 되었고 그 위선자들은 결국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 조차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훼방꾼이 되어 버렸다. 바다와 육지를 건너는 열심으로 이방인들의 개종을 이끌어냈지만, 자신들이 지옥에 들어갈 자들이었기에 개종자들을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하였다. 

 

    이처럼 위선의 문제는 지도자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고 구원의 길을 막아버리거나 공동체를 몰락시키는 치명적인 죄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서 위선적인 사람은 대단히 위험하다. 자기 기만으로 가득 차 있으면 자신의 판단과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해 더욱 열심히 활동하고, 그 결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몰락의 길로 함께 간다. 이러한 점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지도자를 예수의 가르침에 기초해서 분별할 수 있어야 함을 깨달을 수 있고, 나 자신이 이러한 사람이 아닌가 되돌아 보아야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다 아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늘 끊임 없는 자기 부정을 통해 우리 자신을 수정해나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살기 위해 오늘도 말씀을 보고 내 삶을 되돌아 본다.

 

-세 번째와 네 번째 화(23:16-24)

    세 번째 화와 네 번째 화는 ‘눈먼 인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한다. 이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도 자신의 진실성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발전시켜 나갔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한 말을 강조하려고 성전의 금과 같은 것을 이용했다. 그러나 금은 금 자체로 거룩한 것이 아니라 성전에 있기 때문에 구별되는 것이다. 즉, 성전이 금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당시 유대인들은 더 작은 것 (성전의 금, 제단 위의 예물)과 더 큰 것(성전, 제단)을 반대로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성전이던, 금이던, 제단이던, 예물이던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맹세나 맹세의 대상도 결국 하나님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밖에 없다. 이 것은 잘못된 기준을 적용하여서 사소한 맹세들로 중대한 맹세들을 무시하는 편의주의적인 태도이다. 쉽게 말하면 덜 중요한 것을 지키기 위해 더 중요한 것을 버리는 행위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맹세는 그것을 하는 자의 비진실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떤 것이든 그것을 통해 맹세를 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가 결여된 불경스러운 행동이다. 

    

    마찬가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드리는 일에는 철저했다. 그러나 율법의 근본 정신인 ‘정의’와 ‘자비’와 ‘신실함’은 버림으로써 십일조 준수마저도 형식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하루살이는 건저내고 낙타는 삼킨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당시 유대인들은 곤충을 부정한 것으로 생각해서 자신들이 마시는 물이나 음식에 이런 벌래들로 인해 부정해질까봐 굉장히 주의했었다. 그러나 더 큰 부정을 나타내는 낙타는 그대로 두고 삼킨다는 표현으로 결국 그들이 외적이고 사소하고 비본질적인 것에 집착하느라 내적이고 중심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외면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이러한 모습이 있을 수 있다. 예배에 나오는 것, 헌금을 내는것과 같은 외형적인 것들에는 힘을 쏟으면서, 사회에서는 불법을 행하고, 약자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은 전혀 없이 살아가고, 매일 매일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 뜻과 다른 나의 모습을 교정하기보다는, 그저 살던 대로  하던 대로 살아가는 모습들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같은 모습이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화(23:25-28)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화는 어쩌면 세 번째, 네 번째화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화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겉과 속이 다른 문제를 비판하고 있다. 그들은 외적인 종교 행위에 신경을 쓰면서 내적인 내면을 청결하게 하는 것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 모습은 마치 컵의 겉은 깨끗히 닦으면서 속은 닦지 않고 사용하는 모습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결법의 핵심은 결국 ‘윤리적 졍결’이다. 윤리적 정결이 없는 제의적 정결은 모순이다. 특히 ‘탐심’으로 번역한 ‘아르파케'의 주된 의미는 남의 것을 빼앗는 강도짓 혹은 폭력이다. ‘방탕’으로 번역한 ‘아크라시아’는 성적인 부도덕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되는 용어인데, 자기 절제가 되지 않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잔과 그릇이 부정한 이유는 욕심을 절제하지 못해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뺏은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잔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이웃을 위해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여섯 번째 화에서도 같은 내용인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은 그 속은 뼈와 썩은 것들로 가득하지만 겉만 그럴듯하게 시멘트를 발라놔서 꾸며놓은 무덤과 같다. 사람들에게는 경건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는 불법의 사람일 뿐이었다. 

 

    

 

    천국 문 앞까지 갈 만큼 열심을 내었고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해 온 도시를 헤맬 만큼 열정이 있었다. 하지만 독이 되는 열심이었다. 눈먼 인도자의 열정은 자신도, 회심자도 죽인다. 천국에  가자고 인도하여 자신보다 더 지옥 갈 사람으로 만든다. 위선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앞에 바로 서자.

 

    ‘도무지 멩세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맹세가 필요 없을 만큼 진실하라는 뜻이다. 자기 편의대로 지켜도 되는 맹세와 안 지켜도 되는 멩세를 나누는 이들의 모습은 얼마나 간사한가? 예물로 하는 맹세로 순종할 의지가 없는 자신의 마음을 숨긴 저들의 탐욕을 닮지 말아야 한다.

 

    문자만 남고 속 뜻은 버렸다. 십일조는 드리지만 십일조 정신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다. 알맹이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신앙이다. 겉은 화려하나 속은 썩어서 악취가 난다. 아무리 화려하게 장식해도 무덤은 결국 무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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